'유퀴즈'의 눈물과 '김부장'의 웃음 사이... 온실 속 화초에서 야생화로 거듭난 배우의 재발견

(MHN 홍동희 선임기자) "저 이번에 내려요."

1998년, 캔커피 광고 속 명세빈의 이 한 마디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수줍게 건넨 그 말은 단순한 하차 알림이 아니라, 뭇 남성들을 향한 설렘의 초대장이었다. 그렇게 명세빈은 '국민 첫사랑'이 되었고, 영원히 늙지 않는 박제된 청순함 속에 머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난 26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명세빈은 우리가 알던 그 '신비주의' 속의 요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해맑은 미소로 "카드값이 없어 아끼던 가방을 팔았다"고 고백했고, 이혼 후 겪어야 했던 생활고와 단절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이날 방송에서 대중의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린 것은 그녀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였다. 연기자로서의 설 자리가 좁아졌을 때, 그녀는 플로리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화려한 꽃을 다루는 우아한 직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거운 물통을 나르고 가시에 손을 찔리는 고된 육체노동의 현장이었다. 

결혼식장 한구석에서 "어? 명세빈 아니야? 연기자였지?"라고 수군대는 하객들의 시선을 견디며 그녀는 묵묵히 꽃을 꽂았다. "힘든 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는 그녀의 회고처럼, 그 시간은 온실 속의 화초였던 그녀를 비바람을 견디는 야생화로 단련시킨 숙성의 시간이었다. 

그 단단해진 내공은 현재 방영 중인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부장 이야기')에서 비로소 만개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명세빈이 연기하는 '박하진'은 류승룡(김낙수 역)의 아내이자, 위태로운 중년의 가정을 지탱하는 현실적인 가장이다. 그녀는 이 배역을 위해 트레이드마크였던 긴 생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숏컷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외모의 변화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의 맛이다. 남편 몰래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다 들킨 그녀가 던진 "내가 네 아빠 팬티를 20년을 빨았는데 좀 그래도 되잖아. 안 그래?"라는 대사는, 과거 '레쓰비' 광고의 청아한 목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청자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박하진은 2년 전 '닥터 차정숙'에서 보여주었던 최승희의 서늘한 독기와는 또 다르다. 최승희가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욕망의 화신이었다면, 박하진은 삶의 비루함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는 생활의 달인이다. 명세빈은 "결혼 생활을 오래 해본 적이 없어 고민했지만, 나도 모르게 하진에게 빙의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겪어낸 삶의 풍파가 연기라는 그릇에 담길 때 얼마나 깊은 맛을 내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류승룡이라는 거대한 에너지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그를 보듬고 때로는 리드하는 그녀의 연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첫사랑'을 보지 않는다. 대신, 함께 늙어가고 싶은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를 발견한다. 

명세빈은 방송에서 "청순과 풋풋함은 20대의 것이지 40대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거의 영광을 내려놓은 그 자리에는 '생활인 명세빈'의 치열함과 '배우 명세빈'의 노련함이 채워졌다. 백혈병 걸린 친구를 위해 삭발을 감행했던 신인 시절의 그 용기가, 이제는 중년의 위기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여유로 진화한 것이다.

환상열차에서 내린 명세빈은 지금, 두 발로 단단히 대지를 딛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 걸음걸이가 20대 시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당당해 보이는 것은, 그녀가 입은 옷이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땀과 눈물로 짠 '현실'이라는 옷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전성기, 아니 그녀의 진짜 전성기는 바로 지금부터다.

사진=MHN DB, tvN,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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