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할 수 없는 나만의 의식儀式'

intro.
아프리카를 잊지 못한다. 가장 찬란했던 내 청춘의 대륙. 그곳에서 느꼈던 감각과 경험들은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살아있으며 예술적 영감(靈感)의 보물 창고다. 나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생명력을 닮은 책들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다시 기억하려 한다. 그리하여 강인한 생명의 힘을 품은 그림으로 끝내 삶이 성숙되기를 원한다. 여섯 번째 책은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글/문학동네)이다.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는 민간인이 참혹하게 학살과 희생을 당했던 제주 4.3 사건이 배경인 이야기다. 주인공 경하의 친구 인선의 엄마는 제주 4.3사건의 유가족이다. 인선의 엄마는 어렸을 때 학교 운동장에서 학살당한 시신들 사이에서 오빠와 어린 여동생의 시신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차갑게 식은 시신의 맨 뺨에 쌓인 눈의 기억은 인선의 엄마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경하가 인선과 촛불을 사이에 두고 눈밭에 누워있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듯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준다는 경하의 독백은 타인의 아픔과 트라우마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치유를 향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소설에서 ‘눈’은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인선은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물이나 바람 해류처럼 순환하며 생기는 눈송이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눈이 향하는 곳의 슬픔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그 자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듯이 기꺼이 고통의 영혼과 손을 잡는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처참하고 비극적인 역사 속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공감’이라는 감각만 있었어도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쩔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 것일까? 나는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섬에서 자연이 만든 황홀한 풍경과 스파이스 농장에서 맡은 열매들의 향기를 맡으며 신神의 존재를 느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섬에서 과거에 노예를 무역하기 위해 사람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축사보다 못한 장소를 보고 신神의 부재를 느끼며 혼란스러웠다. 내가 겪지 않았어도, 그 고통이 느껴졌다.
아프리카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월레 소잉카의 「오브 아프리카」에는 베냉공화국의 우이다에 ‘망각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나무에서 행해지는 의식儀式이 있는데, 노예 상인들이 노예들에게 쇠고랑을 채운 채 망각의 나무를 빙글빙글 돌면서 의식을 행하게 했다. 목적은 노예들의 과거의 기억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었다. 또 다른 목적은 희생자들이 타향에서 죽어서 그들의 혼이 돌아와 능욕한 자들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의식을 치르게 했다는 것이다. 노예 상인들은 다름 아닌, 같은 동족이다. 그러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역사를 잊을 수 있을까?
인권을 유린한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이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당한 희생의 역사를 망각하기를 바란다. 비극의 역사는 복사하듯이 반복되며, 우리는 그러한 기억들과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작별할 수 없다. 희생자들의 영혼과 손을 잡고 기억의 불을 댕겨주고 싶은 한강 작가의 염원은 문장 하나하나에 의식처럼 새겨져 있음을 공명하게 된다.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캔버스에 눈송이를 찍는다. 인선 엄마의 고통의 신음이, 망각의 나무를 돌며 발목에 채운 아프리카 노예들의 쇠고랑 소리와 제주의 바다 내음과 거센 바람의 진동이 함께 혼재된 거친 화면을 그린다. 그리고 물방울 같이 생긴 하얀 눈송이를 반복해서 찍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에서 쏟아지는 폭설일 수도 있겠다. 눈처럼 하얀 기억이 고통에 내려앉아도 쓰라린 역사를 절대 망각할 수 없고, 작별할 수 없는 아픔을 품고 달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다.
글, 천지수(화가·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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