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대생이 되기까지에는 또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경희대와 연세대에서 내 입학이 부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두 학교가 합동으로 '김세일 부정입학, 입학무효'를 주장하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언론에서도 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종환감독은 나를 불러 "문교부에서 조사가 나오면 무조건 시험을 봤다고 그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고려대와 경희대 두 대학에 다 합격한 나를 두고 집안에서도 회의가 열렸다. 큰형은 경희대를 권했다. 당시 큰형은 경희대학에 다니다 등록금을 못내 포기했다. 그 때 경희대에서는 큰형을 복교시켜주고 여동생도 경희여고에 다니게 해준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경희대학에 다니던 둘째형이 “내가 학교를 그만 두는 일이 었어도 너는 고려대에 가라”고 했다. 나중에 둘째형은 경희대를 자퇴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집안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렸다.

내 문제의 해결은 이종환 고려대감독이 했다. 당시 경희대 박영균 감독의 동생(박영배)도 경희대에 들어갔다. 내 동기였던 박영배는 광성고에서 퇴학을 당해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졸업을 한달 남기고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희대는 수업일수가 모자라는 영배를 합격시켜 이게 약점으로 잡혔다.  

이종환감독은 이 문제를 빌미삼아 몇년 후배였던 박영균 감독과 협상을 했다. '너희가 김세일을 고대생으로 인정하면 우리도 박영배의 경희대 입학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일종의 거래였다.

나는 이종환감독의 협상(?) 덕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리고 고대인이 됐다. 

당시만 해도 우수선수의 스카우트는 이처럼 무자비했다. 아이스하키 뿐만 아니라 농구 야구 등 인기종목이 모두 그랬다. 그만큼 연세대학과의 라이벌전이 중요했고, 스카우트는 치열했던 것이다.

‘너는 정기전만 뛰어라’.

고대에 입학했을 때 내게 주어진 명령이었다. 지금 다시 내게 학교를 선택하라고 하면 기어이 고대를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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