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려대, 경희대 두 대학의 스카우트 싸움에 오랜 감금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광성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기로 해 나가려 하는데 고대에서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김만영 코치(이후 감독, 고려대 아이스링크 관장을 지냄)가 어머니와 함께 오셨다. 광성고 선배이기도 했던 김만영코치는 어머니 설득에 성공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고려대에 붙잡혔다. 나는 "입학시험이 다 끝났는데 이제 뭣하러 가느냐"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번에는 산정호수였다. 2월이었다. 그곳에 가니 고려대 추리닝과 유니폼을 줬다. 백넘버도 달려 있었다. 17번. 기억이 생생하다. 산정호수는 당시만 해도 각 팀들의 한데 모여 훈련을 하는 아이스하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몇일 후 새벽, 나는 다시 서울로 나올 수 있었다. 역시 김만영 코치와 함께였다.  마침 그 때가 구정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종환 감독, 이충근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는 다음날 새벽 동대문 운동장 뒤의 송동수 선배 집으로 갔다. 거기서 또 1주일 정도 틀어 박혀 지내야 했다. 그럼으로써 내 운명은 완전히 고려대로 굳혀지게 됐다.

나는 그 뒤 고려대 이공대 안에 있는 고대 운동부(5개부) 숙소에 들어갔다.  

당시 김만영코치가 나를 다시 찾아왔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두번째 고려대의 납치 상황에서 나 김세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려대 입학시험을 치른 것이었다. 아니 치러져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나는 게시판을 보러 갔다. 거기에는 김세일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고 점수까지 적혀 있었다. 경희대에 잡혀 있어서 시험도 치르지 않았는데 점수까지 나오다니...

알아봤더니 내 동기인 장득봉(중동고 출신)이 내 대신 시험을 쳤던 것이다. 지금은 수능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래서 남의 시험을 대리로 치를 수 없다. 하지만 당시는 각 대학별로 시험날짜가 달라서 대리시험을 보는 일이 있었다. 얼굴만 비슷하면 가능했다.

고려대학도 특정한 날을 잡아 입학시험을 치렀다.  무슨 이유였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입학한 상대는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하루 늦게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그래서 동기생인 득봉이가 내 대신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생 고대에 들어가야 했던 운명이었나 보다.

지금 같아서는 큰일날 일이지만 시험도 치르지 않은 내가 고대생이 됐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만 해도 학생 선발권은 대학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학에서 운동부를 운영하기가 쉬웠다. 요즘은 감독이 선수를 선택해도 교수가 이를 뒤집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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