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에서 연세대를 선택하지 않고 고려대로 진학한 선수들 중에서 뛰어난 선수중 한 명이 박경훈이다. 공격수였던 박경훈은 키는 크지 않았지만 고교랭킹 1, 2위를 다투던 선수였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선수는 중동고의 심의식, 서라벌의정성원 정도였다. 나는 박경훈과 정성원을 고려대로 데려왔다.박경훈의 아버지는 한양대를 원했다. 장안평에서 중고차 매매상을 했던 박경훈의아버지는 한양대학에서 제시한 스카우트 조건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양대학으로 거의 진로가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박경훈의 누나가 동생을 데리고 나를
과거 대학이나 실업 스카우트에는 '다케하시'라는 단어가 꼭 등장한다. 이는 아이스하키 뿐만 아니라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전 종목에서 통용됐던, 스카우트 방식이다. 심지어는 고교에서도 중학생 선수를 스카우트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정확한 일본말이 무엇인지 알아왔다. '다케하나시'라는 말이 한국에 와서 변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남들은 모르는 비밀이야기'라는 뜻의 은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일본인들도 잘 모르는 이 일본말은 '남들 모르게 끼워넣는 스카우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A급 선수를 스카우트 하면서
내가 고려대학교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 함께 다른 종목을 맡았던 분들이 있다. 농구의 박한 감독, 럭비 김영복 감독이었다. 두 분 모두 나보다 선배였고, 체격이 장대해 술을 훨씬 더 잘 마셨다. 더구나 체육위원회 권오식 과장도 역도선수 출신으로 유명한 술고래였다.보통 체육계에서 "고려대 술꾼들에게 걸리면 시체가 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아이스하키에서도 술깨나 마신다는 나는 술대결을 자청했다. 캐나다 전지훈련을 마치고 나서 몸 상태가 좋은 때를 택했다. 김만영 감독이 내게 "한 번 붙어봐라"고 부추긴 것도 작용을 했다. 상대는 박
고려대 코치 김세일에게 가장 큰 고민, 가장 잘 해야 하는 것은 선수 지도 보다도 스카우트였다.당시 라이벌 연세대 사령탑은 광성고 선배인 고 박종국 감독이 맡고 있었다. 70년대에 경성고를 강팀으로 이끌었던 박감독은 80년대 초반 연세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경성고의 우수한 선수들이 대거 연세대로 진학했다.더구나 경성고는 서부 서울에 자리하고 있어서 연세대와 거리상으로도 가까웠다. 83년 신입생 스카우트는 대어가 많았다. 특히 경성고 출신에는 김삼덕, 박현욱, 변선욱, 홍석범 등이 잘하는 선수였다.나는 공격수 중 가장 뛰어났던
83년도 고려대 멤버는 아주 좋았다. 내 뒤를 이어 고려대 감독을 지낸 최원식을 비롯해 한인섭, 한규준, 백운성 등이 있었고 골리는 김증태(선덕고 코치)였다. 2, 3학년들이 팀의 주축이었고, 포지션별 분포가 좋았다.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는 선수로 짜여 있어 출발부터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려대 초기에는 산정호수로 겨울합숙을 다녔다. 그러다가 고려대는 이공대에 야외링크를 만들었다. 합숙비용도 많이 들고, 우리 링크를 갖게 되면 훈련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이공대 운동장 땅바닥에 시멘트로 바닥을 다지고 그
1983년, 지도자 생활 10년 만에 나는 모교인 고려대 코치가 됐다.당시 김만영 고려대감독은 사업을 하느라 선수들을 지도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 들었다. 고려대 월급이 적으니 생계를 위해서 피혁회사의 대리점을 운영했기 때문이었다.이유가 있었다. 당시 고려대 5개부(축구, 야구,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감독은 겸직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은행원이었다. 농구 박한 감독은 산업은행, 야구 최남수 감독은 한일은행, 축구 박영환 감독은 한국전력, 그리고 럭비 김영복 감독은 연수관 관장으로 있었다. 실업팀이 없었던 아이스하키의 김만영 감독
내가 보성고에서 지도했던 탄동은, 정은섭, 정진수 등은 고교 최고의 기량을 갖춘 초고교급 선수였다.탄동은이 3학년 때 보성고는 전 대회에 전승의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 위의 학년인 김광환, 이종화, 김대희, 김성환이 3학년 때에는 전승을 거둬 오다가 마지막 대회에서 광성고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2년 연속 무패, 전관왕 신화를 썼던 것이다. 보성이 전승을 하게 된 이유는 팀의 구색이 아주 잘 맞았다. 탄동은은 윙으로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면서 슛이 아주 정확해 득점력이 최고였다. 탄동은의 스피드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드리
내가 보성고에서 지도자를 했을 때 가르쳤던 제자 중의 한 명이 탄동은이다. 지금은 유리관련 사업가가 된 탄동은은 내가 갖고 있던 최단 시간 해트트릭 기록을 깼다.나는 광성고 시절 경복과의 게임에서 27초 만에 3골을 넣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탄동은은 고교 2학년 때 휘문고와의 경기에서 21초 만에 3골을 넣어 스승인 내 기록을 깨버렸다. 탄동은의 득점력은 정말 놀라웠다. 탄동은은 엄청나게 빠르고, 슛이 강하고 정확한 레프트 윙이었다. 자기 포지션에서 100% 역할을 해내는 선수라고나 할까.내가 보성고등학교 코치에 부임했을
보성고 감독시절 경성고와의 게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임병철선생(전 휘문고 감독)이 주심을 맡았는데 보성고에 불리한 판정을 했다. 동대문링크는 관중석과 아주 가까웠다. 보성 선수였던 임형석의 아버지가 화가 나 선수들이 사용하는 주전자를 임선생에게 던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임병철선생은 물벼락을 맞았다. 그런데도 임선생님은 누가 물통을 던졌는지 몰랐다. 그뒤 한참 시간이 지나 고교선발팀이 일본 닛코로 원정경기를 갔다. 그 때 임형석 부친이 경비를 부담했기 때문에 단장으로 갔다. 임병철 선생님이 감독, 내가 코치였다.저녁 때 회식을
보성고 감독 시절 지도했던 김기수라는 제자가 있었다. 복싱선수 김기수씨와 동명이인인 기수는 3대 독자였다. 기수 어머니는 내 기억으로는 아들을 보기 위해 산정호수에 가장 많이 오셨던 분이다. 나는 "제게 한 번 맡기셨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기수 어머니는 먹을 것을 사들고 계속 찾아오셨다. 기수네 집은 일본에서 사업을 했다. 그래서 집안은 부유했다. 산정호수에서 합숙을 할 때면 기수 어머니는 3대 독자 아들이 보고 싶어 거의 매일 찾아오셨던 것이다.보성고가 만든 훈련장 앞에는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 훈련을 하다가 언덕
이준철선배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았을 때 당시의 보성고 선수들의 기량은 타팀 선수들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뒤쳐진 실력을 짧은 기간 내에 끌어올리는 방법은 혹독한 훈련 뿐이었다. 그래야만 앞서 있는 다른 고교 선수들과 수준을 맞출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겨울합숙을 한 달 예상하고 산정호수로 들어갔다. 산정호수에 들어가면 일단 선수들과 함께 아이스링크를 만들었다. 각 팀마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400m 트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400m 트랙 한가운데에는 아이스링크를 만드는 것이다. 400m 트랙은 선수들의 스케이팅
나는 보성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딱 3년만 하려고 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니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그런데 선수를 지도하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달라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학생들이 빨리 실력이 좋아지는 걸 보니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나 나름대로 흐뭇했다. 특히 짜릿한 승부는 매번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지만 대결에서 이기고 났을 때의 기쁨은 그 어느 것에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1년 더, 1년 더를 하다가 40년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군대를 가
내가 72년 겨울 보성고 코치로 부임했을 때에는 민병찬(현 협회부회장), 신현구(전 보성고 감독), 정기련(보락대표이사) 등이 고3 이었다. 이들은 고1 때에도 우승을 했던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보성중학교 때부터 한솥밥을 먹었던 이들은 짜여졌던 멤버가 그대로 보성고로 진학해 윤수길, 이외덕 등 쟁쟁한 멤버를 구축했던 광성고를 꺾고 전국대회를 제패한 실력파였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고3에 진학해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손창기가 이끌던 경희고, 김철호(현 협회 이사)가 이끌던 중동고 등에게 무릎을 꿇었다.왜 그런가 분석을 했더니 부모
내가 대학시절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대회는 종합선수권대회였다. 73년 이 대회에서 고려대는 우승컵을 차지했다. 대회는 내가 졸업하기 직전인 2월에 열려 시즌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나는 72년 겨울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보성고 코치로 선수들을 맡아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보성고에는 신현구 민병찬 정기련 등 걸출한 선수들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보성고에 정식 발령은 73년 초에 받았다. 내가 보성고 코치로 가게 된 계기가 있다. 광성고 선배인 이준철 형의 도움이 있었다. 당시 보성고와 경희고에서 동시에 감독을 맡지
대학의 4학년, 아니 5학년이 된 가을 나는 불안했다. 졸업 이후의 진로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실업팀도 없어서 스케이트를 벗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남들처럼 군대를 가야 했다.나는 군대에 가지 못했다. 아니 안 갔다. 고대에서 1년을 더 뛰다 보니 그 사이 육군팀이 해체가 결정돼 더 이상 선수를 뽑지 않게 된 것이었다. 현역입대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는 수 없이 무작정 신체검사를 계속 연기했다. 육군팀이 다시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때 내 몸무게는 53~54kg이었다. 48kg 이하면 신
올시즌에도 용의 저주가 작용하는 것일까?1위 도약을 노리던 강원 하이원이 지난해 챔피언 일본제지 크레인스에 연패를 당했다. 더구나 홈경기에서 거둔 연패여서 하이원이 받은 충격은 예상 외로 크다. 28일 경기가 끝난 뒤 하이원 선수들은 허탈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공교롭게도 하이원은 지난주 상하이원정에서 차이나 드래곤을 만나고 왔다. 드래곤은 지난해 42전 전패를 당하면서 오히려 상대팀의 발목을 잡았다. 드래곤의 전력이 다른 팀들과의 너무 떨어졌던 탓에 드래곤과 연전을 치르고 난 팀은 확실하게 경기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차이나 매
나는 하키를 시작한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패한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1학년 봄 첫 경기에서 연대에 패했다. 2대4로 패한 걸로 기억된다. 멤버는 연대와 대등했다. 그 때 나와 같은조의 멤버는 곽일섭, 양은택 선배였다. 그 형들의 기량은 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패한 것은 우리가 개인플레이를 하다 패한 것이다.나 역시도 그 형들의 개인플레이 못지 않게 혼자만의 플레이를 했다. 그때 나는 구기운동에서 개인플레이는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세대학교에는 김종갑이라는 대형선수가 있었다.
대천 하계훈련의 마지막 날은 언제나 마라톤으로 마무리됐다. 숙소에서 대천역을 왕복하는 약 25km 정도 되는 단축 마라톤이었다. 여름 훈련을 얼마나 잘했나를 점검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나는 4년 동안 계속 1등을 했다. 지금 고우체육회 사무총장 김지선씨(3년 선배, 골리)는 대천 마라톤에서 늘 꼴찌를 했다. 6시간 반 정도 걸려 들어온 기억이 있다. 나는 1시간 40분 정도에 주파했다.김만영코치는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주머니 검사를 했다. 선수들이 도중에서 차를 타고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그래도 몰래 버스를 타고 오다
고려대 아이스하키부는 방학 때마다 5개부가 정기 고연전을 위해서 전지훈련 캠프를 열었다. 겨울엔 산정호수, 여름엔 대천 해수욕장이었다.대천해수욕장 하면 남들은 놀러가는 줄 알지만 우리에겐 '고난의 여행'이었다. 한여름 그 더운 땡볕아래서 오전, 오후 훈련을 무려 다섯시간씩이나 했다. 바다는 가까웠지만 바다에는 거의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체력훈련이 너무 강해서 쉬는 시간이면 잠을 자거나 쉬어야 했다. 그런데 하루는 김만영 코치가 대천해수욕장 앞 작은 무인도에 가자고 했다. 그 섬에 정기선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섬으로 가는 배를
고려대 아이스하키부가 산정호수에서 합숙훈련을 할 때는 경기도 운천에 숙소를 잡았다.그 때는 '마이크로 버스'라고 했던 25인승 버스가 운천에서 산정호수까지 들어갔다.버스 외에는 다른 대중교통편이 없었지만 버스는 아주 고물이었고 가끔 고장이 났다. 버스가 고장 나면 산정호수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버스야 제발 좀 고장 나라"고 기도를 했다. 그만큼 훈련이 고되고 힘들었다.또 눈이 많이 오는 날은 버스가 끊겼다. 그런 날은 시내에서 노는 날이었다. 당구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맘껏 휴식을 취했다. 지금 전북아이스하키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