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이스하키가 위기의 시대와 마주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환위기였다. 이로 인해 쌍방울, 현대정유, 동원산업이 팀을 해체했다. 그러나 한라는 정몽원 회장이 아이스하키에 많은 관심과 애착으로 팀을 계속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한라 단 한팀만 살아남았으니 경쟁할 팀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하키는 90년대에 비해 다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실업팀이 한 팀 밖에 없으니, 국내 대학선수들은 소수의 우수선수 외에는 목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위기였다. 이런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역시 후루가와 전공이 팀을 해체했고, 유키지루시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행복한 일일 것이다. 국가대표팀 감독, 코치로 십수년을 보낸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가끔씩 그 때의 일들을 회상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는 그만큼 아이스하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 전지훈련을 위해 알래스카를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조무성회장이 대표팀 전지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직접 선수단을 인솔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아이스하키팀들은 미국 본토보다 가까운 알래스카 쪽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그래서 알래스카대학과 친
98년의 악몽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한라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나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다시 복귀했다. 당시 입시비리 사건으로 고교, 대학의 지도자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국가대표팀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때는 국가대표 코칭스탭이 되려면 금고 이상의 실형을 받은 사람은 일정기간 자격이 정지됐다. 신호경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 겸 전무이사가 "선배님은 유일하게 벌금형을 받아서 자격이 있으니 국가대표팀을 맡아달라"고 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나는 장우정(전 휘문고감독)과
영화에서나 봤던 형무소 생활. 눈앞이 캄캄했다.처음 들어가니 옷을 발가벗겨 항문까지 검사를 했다. 흉기를 숨겨 자해를 할까봐 그런다고 했지만 지도자로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 1시가 넘어 철문이 철커덕 닫히자 '여기가 감방이구나. 내가 감방에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감쌌다. 구치소는2~3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8명이 두 줄로 머리를 맞대고 잠을 자야 했다. 옆에는 변기, 속칭 '뼁끼통'이라고 불리는 냄새 지독한 재래식 변기가 있었다. 밤에도 불을 다 켜놓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98년으로 기억된다. 내 아이스하키 일생에서 가장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해에 입시비리로 구속돼, 몇달간 성동구치소 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었다. DJ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갑자기 아이스하키 입시비리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나는 이미 고려대를 떠난 지 수년이 지났을 때였다. 일본에서 열렸던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안양 한라가 단일팀으로 출전했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됐던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당시 퇴촌의 집 근처를 산책하고 난 뒤 집앞에 당도했을 때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김세일씨지요?" 그들은 내 신분
90년대 초 한국에서는 농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농구대잔치에서 고려대와 연세대, 중앙대가 실업형들인 삼성전자, 현대전자, 기아자동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멋진 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그 때MBC에서는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를 제작해 역시 히트를 쳤다. 한라 창단으로 실업 아이스하키가 붐을 이루자 96년 마지막 승부를 제작했던 장두익감독은 '아이싱'이라는 드라마를 제작했다. 한라 선수들이 조연으로 출연을 했고 밴쿠버 현지에서 촬영을 했다. 주인공은 장동건, 이승연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한라그룹이 스폰서를 했고 한라 위니
실업팀 스카우트전을 생각하니 이제는 밝힐 때가 된 사건이 있다. 사실 '무덤까지 가져 가자'고 약속을 했던 일이다.이길영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내 광성고 후배인 이명승의 아들. 경복고-연세대를 나온 이길영은 국가대표를 지냈고 공격수로서 아주 잘하던 선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명승을 만나 "길영이는 내게 맡겨라"며 스카우트에 나섰다. 술을 좋아하는 둘이는 점심 때 만나 취하도록 마셔댔고, 한라행을 약속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둘이는 오후 6~7시가 됐을 무렵 이미 코가 삐뚤어졌다. 그런데 신이난 우리는 "2차 가자"며 의기가 투
1997 전주-무주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유치되면서 실업아이스하키는 절정을 이뤘다. 석탑건설, 한라에 이어 동원산업과 현대정유가 팀을 창단했다. 또 국민생명도 김성구 감독을 미리 선임하고 창단작업에 돌입했다. 한국 아이스하키 역사상 처음 실업 5개구단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그 때도 국내 대학팀은 5개였다. 자연스럽게 우수선수를 확보하기 위해 각 팀들의 스카우트전이 뜨거워졌다. 덩달아 선수들의 몸값이 폭등했다. 물론 야구나 농구, 축구에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스카우트비나 자동차를 사준다는 팀이 생겼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파트 를
만도는 97년 8월 전주에서 4개국 초청대회를 열었다. 97전주-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치르고 난 뒤 생긴 전주실내빙상장에서였다. 대회에는 캐나다 캘거리대학팀, 체코 클라루피, 일본 후루가와전공, 그리고 만도가 참가했다.당시 만도는 현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있는 백지선(당시 미국 마이너리그팀 소속)과 석용주(재미교포), 심규인을 초청해 뛰게 했다. 한 대회에만 뛰는 것이었고, 항공료와 약간의 초청료를 지급했다.대회 결과는 캐나다가 우승했다. 만도는 1승2패를 기록한 것으로 기억된다. 백지선은 완전한 수비형 디펜스였다. 확실히 최
만도에게 통한의 패배를 안겨준 석탑건설 이용민 효과를 보고 나서 나는 해외에 있는 동포 선수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캐나다 교포 심규인을 영입했다. 1974년생으로 당시 20대였던 심규인은 메이저 주니어리그인 웨스턴하키리그(WHL)에서 활약했고, 또 1992년 NHL 드래프트에서 에드먼튼 오일러스의 지명(8라운드)을 받은 훌륭한 공격수였다. NHL 계약을 하지 못해 CHL에서 뛰다가 한국에 왔다. 그는 1m 82cm로 당시로서는 체격도 좋았고, 슛이 아주 묵직했다. 전형적인 캐나다 스타일의 하키를 하는 선수였다.심규인은
“감독님 사기 치셨어요”만도 위니아는 95년 10월 드디어 첫 대회에 출전했다. KBS배 대회였다. 대학 5개 팀과 만도보다 몇 달 앞서 창단한 석탑건설 이렇게 7개 팀이 참가한 대회에서 6전 전승을 거둬 우승컵을 차지했다.해외 전지훈련으로 든든해 진 팀워크의 영향도 있었지만 우리 팀 멤버는 그야말로 대학시절 톱 클래스로 분류됐던 선수들로 짜여 있었다. 내 자신이 감독으로서 구성원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기념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내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침 정몽원 구단주도 참석한 자리에서 '감독님도 한 말씀 하시라
“100연승을 하겠습니다”창단 작업을 할 때 사적인 자리에서 나는 정몽원 구단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술 한잔 곁들인 자리에서 호언장담을 했던 것이다.그런데 막상 팀을 창단하고 나니 팀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 주력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운동을 그만 둔 지 오래돼 몸을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대부분 선수들이 지금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하키를 시작한 세대가 아니어서 구력이 짧았다. 일본과의 연습경기에서도 10점 차 이상 패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 대학 강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힘든 경기를 했다.만도는 선
만도 위니아가 캐나다, 체코에 이어 전지훈련지로 택했던 또 한 곳은 일본 닛코였다.지금은 닛코 아이스벅스로 이름을 바꾼 후루카와 전공이 연습 상대였다. 우리는 첫번째 대결에서 경기 내내 수세에 일방적으로 몰리다 0대11이라는 큰 점수차로 패했다. 후루카와는 당시 일본 실업팀 중 최하위팀이었는데도 말이다.경기 후 후루가와 단장은 우리에게 훈수를 했다. 그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변정수 단장과 나를 앞에 두고 "아이스하키는 이런 거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변단장과 나는 부아가 났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당시의 한국 아이스하
만도 위니아는 95년에는 체코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약 6주간 긴 전지훈련이었다. 캐나다는 몸싸움이 너무 심해 우리선수들의 훈련에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도 있었고, 실력차가 너무 크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유럽을 배우고자 했다. 체코는 기술하키를 하는데다 북미선수들에 비해 체격도 아주 크지 않아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다.프라하에서 약 1시간 거리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 지역 클럽팀과 경기를 했는데 우리는 접전 끝에 패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보니 그 팀에 여자선수들이 있었다. 헬멧을 하고 장비를 입으니 우리는
내 기억으로는 1994년 5월 쯤 한라그룹 김주환 당시 인사부장(현 경기도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과 양승준 대리(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전무이사)가 고려대학을 방문해 체육위원장을 만났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만도 위니아에서 팀을 창단하는데 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4개월이 지난 뒤 김성복 위원장이 나를 불렀다. 만도가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한다고 하는데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그 시기에 고려대 아이스하키부는 성적이 좋지 않아 나는 학교와 관계가 다소
1994년. 여름 만도 군포 사옥. 내 앞에는 안경을 쓴 40대 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당시 정몽원 만도 부회장이었다.최신식 건물 내의 집무실 겸 회의실은 웅장하고 규모가 꽤 컸다. 운동선수 생활만 했던 나로서는 대기업 회의실에 들어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엄숙하고 책임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정부회장은 첫 마디로 “선배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려고 하는데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오셔서 고생 좀 해 주시지요”라고 했다. 첫 인상이 참 좋았다. 대기업 간부의 모습 보다는 서민적이고, 대하는
모교에서 나름 잘 나갔던 나는 90년도에 접어들면서 스카우트 싸움에서 연세대에 밀렸다.60년대부터 대학스포츠에 스카우트가 시작된 이후 아이스하키 만큼은 고려대가 절대 우세했다. 학생은 물론 학부모까지 대다수가 고려대를 선호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연세대학 감독에 나의 광성고 후배인 이재현(현 총감독)이 부임한 이후 연대는 이 분위기를 깼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재현 감독은 조기 스카우트를 하면서 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부지런한 이재현은 고교 경기는 물론 중학교 게임에도 직접 찾아가 선수들을 지켜 보면서 유망주를 일찌감치 스카우트
내가 고려대 감독을 맡았던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85년부터 최고의 해를 맞았다. 원동력은 86년 스카우트에서 당시 고교 최강팀이었던 배문고 이동호를 비롯해 박성주, 신호철, 전한석 등과 경성고 오재원, 이상연 등을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86학번 멤버들은 골리부터 공격수까지 한멤버가 아주 튼튼하게 짜였다. 그들보다 한 해 앞선 85년에는 고교 최대어였던 김희우(고려대 감독)를 뽑을 수 있었기에 전성기를 누리는 것이 가능했다. 김희우는 든든한 리더였다. 김희우 이야기는 얽힌 사연
나는 고려대 감독시절 선수들이 잘못을 했을 때 가급적 단체기합은 피했다. 잘 하고 있는 선수가 다른 선수의 잘못 때문에 맞거나 벌을 받는다면 그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단체기압을 줄 때도 있었다. 80년대 중반 대회를 앞두고 2, 3학년 선수들이 팀을 이탈한 적이 있었다. 일명 '산토끼' 또는 '도망병'이라고도 하는 잠적이다. 선수들은 혹독한 훈련이 지겨울 때나, 선배들에게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렇게 도망을 간다.나는 선수를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주장 홍석범에게 부러진 스틱을 다듬은 몽둥이를 주고
스포츠에서 주장의 역할은 지대하다. 리더의 통솔력이 좋은 팀은 자동으로 팀워크가 해결된다.주장의 임무는 팀동료를 잘 이끌어야 함은 물론이고, 감독과 선수가 서로 잘 소통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해야 한다.아이스하키는 3~4개 라인이 쉼없이 링크에 나와 뛰는 종목의 특성 때문에 다른 종목보다도 더 주장의 역할이 강조된다. 주장은 가슴에 '캡틴'의 의미인 'C'자를 가슴에 단다. 또 주장이 벤치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감안해서 부주장 역시 주장 대리(얼터네이트)를 뜻하는 'A'자를 달고 각 라인마다 배치한다. 주장 또는 부주장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