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이사장/부회장 역임

1934년 당시, 미-일 올스타전 멤버로 차출되어 베이브 루스(사진 좌)와 사진 촬영에 임한 이영민. 이 당시 이영민은 백업으로 경기에 나서면서 이에 반발하여 중도 귀국을 선택했다. 사진=대한체육회/일본야구 명예의 전당 보관
1934년 당시, 미-일 올스타전 멤버로 차출되어 베이브 루스(사진 좌)와 사진 촬영에 임한 이영민. 이 당시 이영민은 백업으로 경기에 나서면서 이에 반발하여 중도 귀국을 선택했다. 사진=대한체육회/일본야구 명예의 전당 보관

(MHN스포츠 김현희 기자)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40년이 흘렀다.

이에 한국야구위원회(KBO)를 중심으로 ‘40명의 레전드’를 발표하며 그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매우 뜻깊은 일이다. 특히, 야구 열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스토리 텔링’은 신규 야구팬 창출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한때 야구에 빠졌으나, 지금은 관심에서 멀어진 야구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스토리 텔링은 그래서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프로야구 이전에 대한민국은 ‘고교야구’에 열광했다는 사실. 고등학생 젊은 청춘들의 열정이 서울운동장(동대문 야구장)에서, 또 목동 야구장에서 계속 됐다. 뜨거운 프로야구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고교야구 선수권대회(고시엔 대회)’가 인기 있는 것도 사실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때 불살랐던 젊음의 추억은 프로야구 못지 않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 40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고교 무대를 수놓은 스타들의 존재도 분명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이가 바로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 이영민이다.

고교야구 레전드 1)편,
만능 스포츠맨, ‘코리안 베이브 루스’의 원조 이영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부회장이기도 했던 이영민은 한국야구사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그 해 고교 최고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대한민국 고교야구 역사는 물론, 야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영민은 그 존재 자체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영민은 빼어는 야구 선수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육상 선수이자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고 전신)로 스카우트 된 일은 대한민국 스포츠 최초의 스카우트로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연희 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시절에는 전 조선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도 있고, 육상 경기에서도 5관왕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어느 한 종목을 가리지 않고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했던 것이 이영민의 현역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가 ‘야구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놀랄 만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특히, 동대문야구장(당시의 경성 운동장) 개장 이후 아시아인 최초로 112m짜리 홈런을 기록하는 등 말 그대로 ‘메이저리그급’ 실력을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일본에도 전달, 베이브 루스 등이 참가한 메이저리그(All Americans)와 일본 올스타(All Nippons)의 친선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베이브 루스와 함께 찍은 사진은 중요한 사료로서 대한체육회와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이후에는 식산은행(현재의 산업은행) 야구단에서 활약했고, 광복 이후에는 조-미 친선야구대회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행정가로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부회장 등 각종 야구 관련 행정 업무를 맡았던 이영민에게 다소 특이한 경력이 있다. 바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실제로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 축구 감독으로 ‘이영민’ 이름 석 자가 또렷이 새겨 있다. 갑작스럽게 맡은 대표팀 감독이었지만, 이영민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5-3 승리를 이끌었다. 대표팀이 올림픽 8강에 올랐던 것. 이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비록 이영민은 말년에 야구 외적인 구설수에 휘말려 1954년,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이 부분만 제외하면 그가 대한민국 야구사에 세운 공적은 상당히 뚜렷하다. 이러한 공적마저 잊지 않기 위하여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당시의 대한야구협회)에서도 1956년에 임시 임원총회를 열고, ‘이영민 타격상’의 수상을 결정했다.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고는 하지만, 기준점도 있다. 15경기 이상 출전, 6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만 받을 수 있다. 1958년 초대 수상자, 경남고 김동주 이후 올해까지 64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 역대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중에는 향후 프로야구에서 맹활약을 펼친 선수도 나오고, 감독/코치도 하는 선수도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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