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 찬 '청장님'? 48년차 배우 문경민이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노동 [별 헤는 밤]

문경민, MBN '특종세상' 출연 전립샘암 투병과 막노동… 48년 차 배우가 삶을 대하는 숭고한 태도 12월 개봉 영화 '신의악단' 복귀, 고통 딛고 연주할 생존의 찬가

2025-11-28     홍동희 선임기자

(MHN 홍동희 선임기자) 우리는 그를 '장(長)'으로 기억한다.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해운대'에서는 국가 재난 시스템을 총괄하는 방재청장이었고, 영화 '하모니'에서는 엄격한 규율의 대명사인 교도소장이었으며, '조선명탐정'에서도 권위 있는 양반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묵직한 존재감. 그가 지난 48년간 쌓아 올린 300여 편의 필모그래피는 대개 사회적 지위와 힘을 상징하는 캐릭터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27일 방영된 MBN '특종세상'을 통해 우리가 마주한 문경민의 '현실 배역'은 화려한 제복이 아니었다. 땀에 젖은 작업 조끼, 그리고 기저귀를 찬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 암 투병과 기저귀, 생의 벼랑 끝에서 지킨 존엄

이날 방송은 단순한 근황 공개를 넘어, 한 인간이 생의 벼랑 끝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한 존엄을 목격하게 했다. 2025년 1월,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립샘암 3.5기 판정은 평생 연기만 알고 살았던 베테랑 배우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수술의 후유증으로 배설 조절 능력을 상실해 기저귀를 차야만 하는 상황. 도매로 산 기저귀 박스를 방 한편에 쌓아두고 덤덤히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충격과 연민을 동시에 안겼다.

그러나 정작 문경민 본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6남매 중 자신을 포함해 4명이 암에 걸린 기구한 가족력 앞에서, 먼저 떠난 형님과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누님을 생각하며 남은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장의 부채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 "연기도 일이고 이것도 일이다"

새벽 5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인력사무소 앞을 서성이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 노년 빈곤과 예술인 고용 불안의 현주소였다. "나이가 많아 써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거절 앞에서도 그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혹시 모를 8시 타임을 기다렸다. 공사 현장의 일감을 얻지 못한 날에는 거리로 나가 전단지를 돌렸다.

누군가는 '천만 영화 배우의 몰락'이라 혀를 찰지 모르겠으나, 그는 단호했다. "연기도 일이고, 이것도 일이다. 사람이 살면서 하는 일인데 자존심 부릴 게 뭐가 있나." 이 한마디는 그가 연기했던 그 어떤 고위 관료의 대사보다 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아내와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선 그의 노동은 그 자체로 치열한 삶의 연기이자 투쟁이었다.

 

◇ 스크린으로 돌아오는 문경민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곧 스크린에서 다시 그의 연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는 12월 31일 개봉을 확정한 영화 '신의악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 보위부의 외화벌이를 위해 결성된 가짜 찬양단의 이야기를 그린 이 휴먼 코미디 영화에서 문경민은 '기타리스트 오철호' 역을 맡았다.

10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박시후, 그리고 정진운 등 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그는 또다시 누군가의 동료이자 밴드의 일원으로 우리 곁에 설 예정이다. 극 중 '가짜' 찬양단이 만들어가는 '진짜' 감동의 드라마처럼, 현실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문경민의 연기가 관객들에게 어떤 하모니를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모인다.

기저귀를 차고 건설 현장을 누비던 그의 거친 손이 연주할 오철호의 기타 선율은, 아마도 올겨울 가장 뜨거운 '생존의 찬가'가 될 것이다.

사진=MBN, 호라이즌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