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칼럼] 지평선 너머로 떠난 '영원한 현역', 이순재가 남긴 마지막 대사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90세 청년, 별이 되다"

2025-11-25     홍동희 선임기자

(MHN 홍동희 선임기자) "늙은 배우라고 해서 공로상이나 주는 것이 아니라, 연기 자체로 평가해야 합니다."

지난 2024년 12월 31일, KBS 연기대상 시상식. 구순(九旬)의 노배우는 후배들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무대에 올라서도 마이크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일갈했다. 그것은 단순한 수상 소감이 아니었다. 평생을 '현역'으로 살고자 했던 한 예술가의 자존심이자, 떠나는 순간까지도 연기혼을 불태우겠다는 처절한 선언이었다.

2025년 11월 25일 새벽, 우리 시대의 '큰 어른' 배우 이순재가 향년 90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1956년 서울대학교 연극반에서 연극 '지평선너머'로 데뷔한 지 꼭 69년 만이다. 강산이 일곱 번 가까이 변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한국 대중문화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거목(巨木)으로 우리 곁을 지켰다.

고인의 삶은 '파격'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1990년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로 가부장적 권위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그는, 2000년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야동순재'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입으며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욕을 먹을까 봐 안 하려 했다"던 그는 막상 큐 사인이 떨어지자 완벽하게 망가졌고, 이를 통해 권위적인 노인이 아닌 친근한 옆집 할아버지로 세대 간의 장벽을 허물었다.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지도 한 장 들고 앞만 보고 걷는 '직진 순재'가 되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받으려 하면 늙어버리는 것"이라는 묵직한 가르침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는 화려한 '스타'이기보다 철저한 '직업인'이기를 고집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스타는 껍데기만 보고 쫓는 것이지만, 배우는 창조자"라고 강조하며,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기본기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다. 촬영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대본을 외우고, 밤샘 촬영도 마다하지 않던 그의 성실함은 재능만 믿고 나태해지기 쉬운 후배들에게 무언의 회초리가 되었다.

그의 투혼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무려 200분 분량의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연극 '리어왕'을 원캐스트로 완주했고, 건강이 악화된 2024년에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드라마 '개소리'를 오가며 무대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했다. 비록 건강 문제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예술이란 영원히 미완성"이라며 "완성을 향해 계속 고민하고 도전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라던 그의 말처럼, 그는 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였다.

이제 배우 이순재는 그가 데뷔작에서 동경했던 '지평선너머'로 긴 여행을 떠났다. 비록 그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과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것이다"라는 긍정의 철학은 남은 이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현존으로 남을 것이다.

부디 그곳에서는 대사 암기의 부담도, 밤샘 촬영의 고단함도 내려놓고 편안히 쉬시기를.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캡틴이자, 가장 위대한 배우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KBS, MHN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