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고현정·엄정화… 돌아온 ‘퀸’들의 귀환이 말하는 K-드라마의 지각변동
50대 여배우가 주인공일 때 - 안방의 세대 교체인가, 콘텐츠의 성숙인가
(MHN 홍동희 선임기자) 2025년 하반기 안방극장은 하나의 현상으로 요약된다. 이영애가 26년 만에 KBS로, 고현정이 SBS로 돌아오고 김혜수는 디즈니+와 tvN을 넘나들며, 김희애는 파격적인 JTBC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50대 전후의 ‘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주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몇몇 스타의 반가운 복귀를 넘어, K-드라마 산업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음을 알리는 거대한 지각변동이다. 이 흐름은 일시적 유행인가 아니면 콘텐츠 시장의 구조적 성숙을 의미하는 새로운 표준인가.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플랫폼의 생존 전략이 놓여있다. 글로벌 경쟁이 심화된 OTT 플랫폼에게는 구독자를 끌어들일 차별화된 콘텐츠가 절실하다. 디즈니+ ‘트리거’의 김혜수처럼, 전 세계 시청자에게도 이름값이 익숙한 베테랑 배우를 내세운 ‘웰메이드 장르물’은 10대 위주 로맨스물과 확실한 차별점을 만든다.
반면, OTT에 핵심 시청층을 뺏기고 있는 지상파와 케이블에게 50대 여배우는 ‘가장 확실한 안전자산’으로 여겨진다. KBS ‘은수 좋은 날’의 이영애, SBS ‘사마귀’의 고현정처럼, 이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중장년층이라는 고정 시청률을 담보하는 보증수표와 같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 리스크 속에서, 연기력과 흥행력을 모두 검증받은 이들의 존재는 가장 안정적인 투자처인 셈이다.
이러한 산업적 요구는 시청자들의 문화적 갈증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K-드라마의 주 시청자층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 특히 구매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갖춘 30대 이상 여성 시청자들은 판타지에 가까운 청춘 로맨스를 넘어, 자신의 삶과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성숙한 서사’를 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50대 여배우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신뢰의 아이콘’이다. 이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더 이상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욕망하고, 갈등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로 확장된다.
각 배우의 복귀작 면면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영애는 평범한 주부가 마약 범죄에 휘말리는 현실적인 스릴러로 돌아와 대중적 공감대를 노린다. 고현정은 연쇄살인마라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통해 연기 스펙트럼의 극한을 선보인다. 김희애가 주연을 맡은 ‘골드 디거’는 연상 여성과 연하 남성의 관계를 통해 나이와 욕망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도전장을 내민다.
가수와 배우를 오가며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엄정화의 행보 역시 이 흐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최근 종영한 ENA ‘금쪽같은 내 스타’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멜로의 감성이 젊은 배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했다. 나아가 차기작으로 거론되는 모성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50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다채로운 삶의 얼굴을 그려낼 준비를 마쳤다. 그의 존재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중년 여성 서사’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장르물의 여왕’ 김혜수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디즈니+ ‘트리거’에서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팀장으로, 그리고 모두가 기다려온 tvN ‘시그널’의 시즌2에서 다시 한번 형사 차수현으로 돌아오는 그는, 남성 중심적이던 장르물의 문법을 깨고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 전문가’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다시 한번 K-드라마의 중심에 세운다. 이는 50대 여성 배우가 단순 멜로나 가족극을 넘어 사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장르물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사례다.
50대 여배우들의 화려한 귀환은 방송사와 시청자 양쪽의 필요가 완벽하게 맞물린, K-콘텐츠 시장의 필연적인 성숙 과정이다. 이는 K-드라마가 더 넓은 세대를 아우르고,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물론, 이 흐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왕년의 스타’라는 명성에만 기댄 안일한 기획이 아닌, 그들의 연륜과 내공을 담아낼 수 있는 신선하고 완성도 높은 대본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도전을 성공적으로 넘어선다면, ‘퀸’들의 귀환은 안방극장의 일시적인 세대 교체가 아닌 K-드라마의 저변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사진=MHN DB, KBS, SBS, ENA, 디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