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일의 하키야사] 중랑천 스케이트장은 어디로 가고... 15. 물감, 안개, 그리고 넉가래
내가 고려대 1학년 때 아이스하키부는 모두 17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고대아이스하키부에는 약 30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있지만 그 때는 그랬다.
요즘 하키와 큰 차이가 있다면 게임에 거의1개 조만 투입됐다. 수들간 실력차가 너무나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벤치에 앉아만 있는 선수가 꽤 많았다. 후보선수들은 헬멧을 쓰고 스틱을 들고 있는 모습이 광화문에 있는 충무공 동상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으로 부르기도 했다. 금도 벤치워머를'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주전과 비주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면 그때는 라인을 긋는데 물감을 썼다. 그래서 넘어지면 그 물감이 유니폼이나 무장에 묻어났다. 즉 게임이 끝나로 링크를 나서는 선수 중 물감이 묻은 선수는 주전이요, 그렇지 않은 선수는 후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빙질이 좋지 않아 얼음이 녹았기 때문에 물이 흥건해서 물감칠은 쉽게 옷에 묻어났다.
속칭 '안개보이'도 있었다. 요즘도 목동 지상링크가 그렇지만 여름철 습한 날씨에는 외부와의 온도차가 많이 나 링크에 안개가 낀다. 제습시설이 잘 돼 있는 링크는 안개가 끼지 않지만 당시에는 제습시설은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위해서 안개보이를 동원했다. 중, 고등학교 선수들을 불러 안개낀 링크를 돌게 하면 안개는 조금씩 걷혔다.
얼음이 파이면 정빙은 커녕 넉가래로 물을 밀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요즘 어느 링크에서나 볼 수 있는 정빙기는 아예 없었다. 이탈리아의 '점보니사'가 만든 정빙기는 속칭 점보니로 불렸다.
고대는 선수들의 장비를 모두 지원했다. 고교 때까지만 해도 장비는 선수가 스스로 조달해야 했는데 말이다. 새 장비를 착용하고 사용할 수 있다니.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고등학교까지는 남이 쓰던 장비를 겨우 사서 썼는데 대학에 들어오니 모든 것이 새 장비였다.
고려대는 주로 체력훈련을 많이 했다. 그리고 대회를 앞두고는 동대문링크를 빌려 스케이팅을 했다. 개인이 티켓을 끊어 동대문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말쯤 산정호수가 얼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부터 본격적인 훈련장을 가질 수 있었다. 2월달 까지는 산정호수가 집이요, 학교였다. 하루에 7시간씩 운동을 했다. 눈뜨면 스케이트를 탔다. 그 때는 산정호수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호롱불을 켜 놓고 지내던 시절이니 아침이나 저녁에는 운동을 할 수 없었지만 스케이팅을 맘껏 할 수 있어 좋았다. '산정호수'라는 단어는 지금도 내 가슴을 뛰게 한다.